허정무 감독 “배준호 같은 유망주 발굴 비법이 궁금하다고요?”
허정무(68) 감독을 만나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래마을의 자택을 찾은 것은 9월 첫째 토요일의 오후였다. 그는 거실에 있는 대형TV로 K리그2 경기를 보고 있었다. 대전 하나 시티즌 초대 이사장 자리에서 자신 사임한 것이 6월 30일이었으니, “백수” 두 달이 넘어서고 있었는데 여전히 그는 2부리그 경기까지 챙겨보고 있었다. 천생 축구인이었다.
대전은 그의 사임을 밝히는 보도자료를 통해서 ‘허정무 이사장은 3년내 1부리그 승격이라는 초기 목표를 달성하고, 2023 FIFA U-20 월드컵에서 에이스로 활약한 배준호, 배서즌 같은 유망주를 발굴했으며, 지역내 사랑받는 스포츠 구단을 목표로 홈경기 마케팅과 공공스포츠클럽 도입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현재 기준 K리그 전체 3위인 평균관중 1만4천명을 달성했다’고 평가했다. 보도자료에서 허정무 감독은 “대전이 중요한 변화의 시점에서 한걸음 물러나 후배들을 응원하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것만으로는 여러가지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국가대표와 프로팀을 오가며 현장을 지휘했던 명장, 대한축구협회 부회장과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를 차례로 역임한 행정가에서 프로구단의 CEO로 변신했던 그가 느끼고 경험했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대전 하나시티즌 이상으로 3년6개월을 보내고 퇴임했는데 총평을 해준다면.
축구계, 그리고 연고지인 대전에 어느 정도 임팩트를 주는 기여는 했다고 생각한다. 하나금융그룹에서도 그 점에 대해서는 만족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동안 쓴 돈이 아깝지 않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다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구단의 자생력을 키우는 측면에서는 부족함이 있었다고 본다.
그동안에는 1부로 승격해야 하는 문제가 걸려있다보니 성적에 연연했던 것이 이해는 가는데, 그런 것은 이제 축구 기술자들에게 맡기고 앞으로는 장기적인 것(미래 먹을거리와 비전)을 찾는데 더 신경을 써야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구단 운영 책임을 맡으면서 처음에 구상했던 목표를 얼마나 이뤄냈는지는 퍼센터지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달성하지 못한 것들이 꽤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못내 아쉽다.
-어떤 점이 가장 아쉬웠다는 건가.
우리나라 프로축구가 출범한지 벌써 40년이 넘었다. 1,2부 합쳐서 팀만 25개에 이른다. 그런데 그 가운데 정말 조금이라도 자립 기반을 구축한 구단이 과연 몇 개나 될까. 20~30% 정도라도 자립 기반을 만든 구단이 있을까 꼽아보면 상당히 안타깝다.
프로구단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사장이든 직원이든 가리지 않고 우선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이 우선이 되면 좋겠다. 매년 성적에만 급급하다보면 바람불고, 태풍불면 그냥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정말로 멀리 갈수 있고 튼튼한, 팬들에게 사랑받는 구단이 되려면 1차적으로 그런 기본이 먼저 만들어져야만 한다.
-대전은 시민구단에서 기업구단으로 전환한 사상 첫 사례다. 창단 과정부터 많이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과거 1970년대 초반에 장덕진 대한축구협회장이 계실 때가 금융단 축구의 전성기였다. 그분이 많은 은행축구팀들의 창단을 이끌어내서 우리나라 성인 축구가 한단계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이후 금융단 팀들이 전부 다 없어져버렸다. 그런 점을 개인적으로 참 아쉽게 여기고 있었다.
하나금융그룹의 김정태 회장님이 워낙 축구에 애정이 많으신지라 대한축구협회와 K리그에 꾸준히 큰 지원을 해주시고 계시다. 몇년전에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때 내가 “앞으로 은행도 글로벌 마케팅을 해야 할 터인데 축구단을 운영하면 효과적이지 않겠느냐”며 제안을 했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한번 검토를 해보자”는 반응에서 “좋다. 그러면 한번 해보자”는 단계로 진전됐다.
-그럼 연고지는 어떻게 대전으로 결정된 것인가.
그래서 하나금융그룹 내부에서 TF팀을 만들어서 축구팀 창단을 준비하게 됐다. 그게 대략 2079년 5~6월 쯤 이었다. 그런데 금융 당국에서 은행이 직접 팀을 창단하는 것은 여러 가지 규정상 어렵다는 식으로 판단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난감한 상황이 된 것이다. 나는 다음 시즌을 정상적으로 준비하려면 최소한 9월에는 팀 창단이 가시화되어야 한다고 봤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김 회장님이 “창단이 어렵다면 기존 팀을 인수하는 것은 어떠냐”고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 인수할 수 있는 팀으로 시민구단 두 곳과 기업구단 한 곳 등 세 군데가 후보로 거론됐는데, 하나금융그룹의 뿌리 가운데 하나가 충청은행이었으니 “연고가 있는 대전으로 갑시다” 이렇게 결정됐다.
허태정 당시 대전시장도 시민구단 운영에 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양쪽의 이해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거였다. 모양새를 좀 더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서 대전시가 하나금융그룹에 어려움에 처한 시민구단을 인수해달라고 요청하는 형태로 큰 그림을 그려 간 것이다.(대전시는 그해 8월경 하나금융그룹에 ‘대전 시티즌 투자 유치 제안서’를 제출하면서 2개월간의 협상에 돌입하게 된다.)
-대전시와 인수 협상은 어려움없이 잘 진행됐는가.
아니다. 당연히 진통이 있었다. 가장 쟁점이 됐던 것은 대전월드컵경기장 장기 임대에 관한 권리였다. 우리는 스포츠산업진흥법이 허용하는 최대치인 25년간 장기 임대를 원했다. 반면 대전시는 5년 단위로 계약 연장하는 것을 주장했다. 현재 인천시와 인천 유나이티드 사이의 숭의축구장 계약도 5년 단위의 관리 위탁이다. 좀처럼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어느날 허태정 시장, 대전시 체육국장, 하나금융그룹 함영주 부회장(당시) 등이 회의를 했다. 나는 “장기 임대가 핵심 사안이다. 구단이 경기장을 장기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반드시 25년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대전시는 이제 하나금융그룹이 인수를 하는 단계가 되니까 아쉬울게 없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는 분위기였다. 이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대전시 의견처럼 5년으로 할 거면 구단 인수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접고 없던 일로 하시죠”라고 아주 강하게 태클을 걸었다. 그러자 결국 대전시가 양보를 해서 25년 계약을 하게 된거다. 이와 별도로 협상이 계속 늦어졌는데 “어렵게 구단 인수를 결심한 하나금융쪽에도 대전시가 선물을 하나쯤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해서, 경기장 잔디 전면 교체 약속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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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 협상이 늦어지면서 당초 예상했던 창단 일정도 순연됐는 것인데.
시간이 걸리면서 실제로 창단식은 해가 바뀐 2020년 1월에야 열리게 됐다. 애초 생각했던 스케줄보다 너무 늦어지면서 그해 시즌에 대비한 선수 구성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게 승격 목표 달성에도 어느 정도 악영향을 줬다.
-인수이면서도 창단이었던 셈인데, 창단 목표는 어땠는가.
창단할 때 2부리그에 있었으니 3년 안에 1부로 승격시키겠다는 게 첫 번째 목표였다. 두 번째는 아까 얘기한대로 대전월드컵경기장 장기 임대를 발판으로 사업 모델을 만들어서 구단의 중장기적인 자립 구조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사실 대전월드컵경기장과 주변 환경은 서울월드컵경기장보다 오히려 더 장점이 많다. 잘 활용하면 구단의 자립 기반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자립 기반 구축에는 실패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더라. 처음에는 구단 프런트 조직도 완전히 새 사람으로 짜서 맨파워를 단단하게 구축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인수 과정에서 결국 시민구단 때의 직원들을 거의 다 고용승계를 하게 됐다. 또 경기장 장기 임대를 했지만 시와의 실제 계약에서는 디테일한 조항에서 여러 제약들이 많이 나타났다. 사업을 제안하면 시에서 조례를 바꿔야 한다고 핑계를 대면서 시간을 끄니 방법이 없었다.
외부 컨설팅도 받고 민간자본 투자 계획도 세우면서 중장기 프로젝트를 만들어갔는데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추진 방향을 다들 이해는 하면서도 그런 사업은 1부로 승격하고 난 뒤에 해도 되지 않겠냐는 식이었다. 구상했던 사업 계획에는 운동장 옆에 에어돔 형태의 실내 연습장, 주차 타워, 최신 골프연습장 건립 같은 것이 포함돼 있었다.
-대전에 있는 동안 이사장 신분으로도 많은 유망주들을 길러냈다. ‘대전판 허정무의 아이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대덕구에 있는 덕암축구센터에서 아이들을 직접 새벽에 훈련시키고 개인기를 전수해 준 것은 유명한 일화다.
프로 1군 훈련장에는 거의 가지 않았다. 내가 간섭한다는 이야기들을 주변에서 하도 많이 하니까(웃음). 하지만 유스팀 아이들은 내가 좀 가르키고, 키워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 축구도 그렇고, 각 구단도 그렇고 유스를 제대로 교육시키고 성장시키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처음 대전에 와보니 이전까지 유스 선수들을 잘 키우지 못했다. 지난 10년간 구단 산하 유스팀에서 제대로 선수를 육성해 프로로 보낸 사례가 거의 없더라. 그래서 스카우트 시스템도 바꾸고 내가 직접 다른 지역 팀의 선수들도 살펴보러 다니고 그랬다.
대회가 열리는 경기장과 훈련장을 찾아다니면서 아이들을 살펴보면서 뽑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아이들은 기본기에 집중하면서 성적은 신경쓰지 말라고 했고, 고등학생은 프로에 가는 길목에 있는 아이들이니 미팅도 같이 하고 아침에 함께 운동도 하면서 직접 전수를 해줬다. 나중에 입단 평가를 할 때는 별도의 평가위원을 배치해 활용했다. 하지만 내가 선발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보는 눈들은 다 비슷하더라.
-올해 U-20 월드컵 핵심인 배준호와 배서준, U-17 대표팀의 윤도영이 그렇게 발굴한 선수들인데.
윤도영이를 처음 보고는 “너는 앞으로 윤정환이나 고종수보다 훨씬 잘할 수 있는 선수”라고 이야기 해줬다. 그러면 아이들은 막 신나서 더 잘한다(웃음). 배준호는 고등학교 때 대전 유스가 아닌 평택진위FC 소속이었는데 우리 유스팀하고 붙여보니 도저히 상대가 안될만큼 잘하는 거다. 나중에 우리 프로 2군하고도 경기를 하게 했는데, 역시 뛰어나더라. 배준호말고도 그때 진위FC에 좋은 선수들이 많았다. 그래서 6명을 우리 팀으로 데리고 왔다.
그중 준호와 서준이가 20세 대표로 올래 U-20 월드컵에 나갔지만 나머지 4명도 다 좋은 선수였다. 선수느 실력을 보고 뽑는거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뽑아놓은 아이들이 지금은 다른 팀에서 다 활약하고 있다. 충북청주의 핵심인 양지훈, 김포의 송창석, 부천의 김선호 등이 모두 대전을 거쳤다.
-2부리그에 있는 상황에서도 B팀을 만들어 K4리그에 출전시켰다.
유스를 키우고, 뛸 기회와 경험을 많이 만들어주기 위해서 K4리그 참가를 결정했다. 대신 여기에 출전하는 B팀은 24세 이하 선수로 한정시켰다. 1군에서 부상 당한 선수들이 재기나 재활을 위해서 뛰는 팀이 아니라, 어린 선수들이 경쟁하고 경험하는 팀으로 규정한 거다. 아마도 다른 구단의 B팀은 그런 식으로 운영 하지는 않을 거다. 유스 성장을 위한 마지막 연결고리로 B팀을 상정한 것이다.
-배준호가 최근 스토그시티에 입단하면서 ‘대전 허정무의 아이들’ 가운데 제일 먼저 유럽 진출에 성공했다.
준호가 영국으로 출국하기 전에 부모님과 함게 인사하러 찾아왔더라. 밥을 사주면서 옛날에 내가 PSV 에인트호벤(네덜란드)에 있을 때 경험담을 많이 들려주었다. 절대 주눅들어서 움츠려 있지 말고, 동료 선수들이나 코칭 스태프에게 적극적으로 먼저 다가가라고 이야기했다. 아시아에서 왔다고 하면 처음에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텐데 실력으로 이겨내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근성과 승부욕이라고 조언했다.
-이 질문은 다른데서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박지성, 이영표를 발굴한 사례에서 보듯이 유망주를 골라내고 키워내는 안목이 탁월한 것으로 유명한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가.
비결이라고까지 할 것은 없고… 어린 선수들을 볼 때 4가지를 살펴본다. 첫 째는 지능을 보고, 두 번째는 체질과 체력, 세 번째는 소질과 감각, 마지막으로는 성격이다. 이를 종합하고 세심하게 살펴서 판단하면 좋은 선수를 뽑을 수 있다. 자꾸 하다보니 감이나 촉도 생기는 것 같다(웃음). 뽑은 선수들을 가르칠 때는 장점을 우선적으로 키워주려고 노력한다. 단점을 먼저 지적하면, 부작용이 많다. 장점이 커지다보면 자연스럽게 단점도 적어질 수 있다.
-하지만 대전 구단이 특정 팀에서 선수들을 많이 뽑고, B팀 운영에 대해서도 축구계에서 여러 구설수가 많았다고 하던데.
나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도 답답해서 하나금융그룹 쪽에 감사를 철저하게 해보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문제가 있었다면 사법 처리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도 말했다. 그런 이야기가 떠도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답답하다. 내가 대전을 나오니 다음 시즌부터 B팀을 없애는 논의가 있다고 한다. 요즘 학교 선생님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학교 문제가 사회 이슈가 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학교를 없애면 되는가. 유스를 키우는 시스템인 B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재임 기간동안 3년만에 승격에 성공했는데, 쓴 돈에 비해서는 늦었다는 비판도 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는 법이다. 첫 시즌은 창단이 늦어 준비가 제대로 안됐고, 당초 목표대로 3년만에 승격했으면 합리적인 수준에서 올라갔다고 본다.
-창단 주역으로 구단을 떠나는 게 시원섭섭한 상황이었을 것 같은데.
나는 인천 유나이티드를 떠날 때도 그렇고,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에서 물러날 때도 그렇고, 항상 진퇴는 깨끗하게 하려는 사람이다. 어디에서건 거취를 질질 끌고 그런 적은 없었다고 자부한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16강을 달성한 뒤 협회에서 재계약을 하자고 했었다. 하지만 역대 국가대표팀 감독은 항상 잘려서 나왔는데, 내 발로 걸어나오는 선례를 한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 재계약을 안하고 스스로 나왔다.
-그때 연임 요청을 받아들여 대표팀 감독을 장기적으로 하는 선례를 만들었더라면 그 이후 대표팀 운영이 많이 바뀌어서 조광래 – 최강희 – 홍명보로 이어지는 아픈(?) 역사도 없었을 것 같다(웃음).
나도 대표팀을 계속 맡았다면 어떻게 됐을까하는 상상을 가끔 해본다. 그때 너무 성급하게 판단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고(웃음).
-파주NFC 건립에 기여하고, 용인축구센터 만드는데 주도적으로 역할한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축구 인생의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 1999년쯤 국가대표팀 전용훈련장을 마련하는 것이 이슈가 되고 있을 때였다. 내가 국가대표팀 감독을 하고 있던 시기라 당시 조중연 대한축구협회 전무와 함게 문제부 박지원 장관을 찾아갔다. 그 분이 고향 선배이기도 하고 평소 나를 조카처럼 아껴주셨던 분인데, 내가 “월드컵을 개최하겠다는 나라에서 대표팀 훈련센터 하나 없는게 말이 됩니까”라면서 읍소도 하고, 간청도 하고 그랬다.
그랬더니 박 장관이 “허 감독, 대표팀 훈련장 만들어 주면 202 월드컵에서 16강 갈 수 있소?”하고 묻어라. (허 감독이 1998년 가을 처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을 때는 2002년 월드컵까지 책임지기로 했다. 그러나 2000년 스디니 올림픽 조별리그에서 2승1패로 아깝게 탈락하고, 이어진 아시안컵에서 3위에 그치자 사임했고 후임으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왔다.) 그래서 내가 “자신있습니다. 만들어만 주십시오”라고 호쾌하게 대답했다.
결국 박 장관이 실무자끼리 협의해서 추진해 보라고 지시했고, 그 이후 물꼬가 터지면서 입지 후보 선정 등을 거쳐서 파주에 지금의 NFC가 만들어진거다. 용인축구센터도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지자체장과 의기투합하고, 시의회 분들을 꾸준히 설득하고 협희한 끝에 만들 수 있었다. 기초지자체 단위에서 엄청난 투자를 해서 이렇게 큰 축구센터를 만든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용인축구센터에서 축구를 배웠던 아이들 중에 대표선수와 프로선수가 계속 배출될 때마다 참 뿌듯하다.
-프로팀과 대표팀 감독은 물론이고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프로연맹 부총재, 기업구단 CEO 등 국내 축구인 중에서 이 정도로 두루 경험을 한 사람은 거의 유일한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어떤가.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감독 시절이 승부사로서 가장 꽃다운 시절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행정가로 있을 때는 여러가지 복잡한 일도 많았지만 돌아보면 다 좋은 경험이었다. 행정일을 하면서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내가 선수들하고 같이 있을 때의 그런 세계에서는 못 느끼던 것을 새삼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평생을 축구계에 있었는데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나는 축구를 통해 많은 혜택을 받았다. 팬들의 사랑덕에 여기까지 온거다. 그래서 축구계에는 계속 무언가를 돌려줘야 하는 사람이다. 앞으로 무엇을 하면더 더 돌려줄 수 있을지는 당분간 쉬면서 고민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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